
“세상은 반대에 끌린다.”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신작 <엘리멘탈> 포스터의 메인 카피다. 이번에는 또 어떤 이야기일까. 기쁨이와 슬픔이를 비롯해 사람의 감정 컨트롤 본부에서 불철주야 일하는 감정 친구들의 스토리(인사이드 아웃)부터 비교적 최근작인 ‘태어나기 전 세상’의 영혼 이야기(소울)까지… 픽사가 우리에게 건네는 감동과 신선함은 언제나 상상 그 이상이다.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의 메마른 가슴을 건드리는 특유의 감성과 독특한 소재, 수준 높은 영상미는 대중으로 하여금 늘 천진한 기대를 품게 한다. 특히 이번 작품<엘리멘탈>은 제76회 칸 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되며 전 세계 평단과 영화계로부터 작품성을 일찌감치 인정받았다.
6월 개봉한 이 영화는 며칠 전 251만 관객을 돌파하며 2023년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최고 스코어를 기록했다고 한다. 한국계 미국인 피터 손 감독이 제작했으며, 영화 곳곳에 한국적인 요소가 묻어난다는 점 때문일까. 한국 흥행 수익이 북미를 제외한 개봉국 중 압도적 1위라는 사실이 또한 인상적이다.
영화는 불, 물, 공기, 흙 이 4 원소가 살고 있는 도시 ‘엘리멘트 시티’에서 불 ‘앰버’가 정반대의 성질인 물 ‘웨이드’를 만나 일어나는 이야기를 그린다. 엘리멘트 시티를 누비는 각 원소 캐릭터는 의인화된 모습으로 구현되는데, 원소의 각 특성을 잘 드러낸 장면 장면들이 정말 기발하고 귀여웠다.
이를테면 물이 도망치면서 아주 좁은 벽 사이를 주르르 흘러 들어간다거나 불이 구름을 스치면 비가 내린다거나 하는 장면들, 건물 위쪽 어딘가에 껴 있는 물 웨이드가 엉엉 울기 시작하자 천장에서 물이 똑똑 떨어지는 장면은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또, 스포츠 경기를 보러 가서 관객들이 파도타기를 하는데 물 원소들이 일어나며 실제 파도를 일으키는 장면 또한 정말 재미있고 놀라웠다. 픽사가 잘하는 것, 통통 튀는 상상력과 이를 더할 나위없이 구현해 내는 영상미가 <엘리멘탈>에서도 빛을 발한다.
이야기는 앰버의 부모가 ‘파이어타운’의 폐가에 터를 잡고 식료품점인 파이어 플레이스를 개업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들은 모든 것을 바쳐 가게를 일으킨다. 아버지는 딸 앰버에게 자신의 전부인 가게를 물려줄 꿈을 꾸고, 앰버도 자기 세계가 파이어 타운과 가족 뿐이었으니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한편 엘리멘트 시티에 살면서 불이라는 이유로 많은 차별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 부모는 앰버에게도 다른 원소들과 섞이는 것, 특히 물과는 교제를 절대 금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연한 계기로 정반대의 성질을 가진 물 ‘웨이드’를 알게 된 앰버는 서서히 자기 안에 공고히 자리 잡았던 신념과 가치관들이 부서지고 깨어지게 되고, 부모와, 또 자기 자신과 갈등하고 고민하면서, 그리고 웨이드와의 특별한 우정과 사랑을 경험하면서 조금씩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자아를 발견해 간다.
디쇽 (불의 언어),
영원한 빛은 없으니 빛날 때 만끽해야 해. (앰버)
- 엘리멘탈 中
앞서 말했듯 이 영화는 한국계 미국인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에서 시작되었기에 한국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있다. 주인공 가족이 고향을 떠나기 전 부모에게 절을 하는 장면, 앰버의 엄마가 커플의 궁합을 봐주는 장면, 장인이 사위 될 사람의 한계를 테스트하는 장면 등 많은 부분에서 익숙한 한국 정서를 느낄 수 있다. 이야기 또한 그런 코드를 담고 있는데,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부모 세대와 그런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효’의 가치가 녹아 있다. 앰버의 부모는 낯선 엘리멘트 시티로 이주해서 가정을 위해 삶의 여유도 없이 희생하고, 앰버는 그런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가업을 물려받아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힌다.
피터 손 감독은 인터뷰에서 “부모님은 내가 식료품 가게를 물려받기를 원하셨지만 나는 그림을 좋아했다”며 “숙제를 하지 않고 공책에 그림만 그리고 있으면, 어머니가 와서 찢어버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겪었던 부모와의 갈등은 고스란히 영화에 담겼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자기의 사업과 가족을 지켜온 부모의 모습이 그대로 표현되었다. 영화 마지막에 감독의 부모님 옛 사진이 나오는데 어쩐지 애틋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우리가 안되는 이유는 백만가지지만 나는 널 사랑해 (웨이드)
- 엘리멘탈 中
영화 속 불 ‘앰버’와 물 ‘웨이드’의 만남은 특별하고 아름답다. 서로의 다름을 경계와 무시가 아닌 아름다움으로 여기며 감탄하는 장면 장면들이 귀하게 느껴졌다. 현실 세계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장면 일 탓일까. 사랑이 많고 감성적인 물, 웨이드와 강하고 아름다운 불, 앰버. 이 둘은 함께 하기 힘든 조건 속에서도 서로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고마워하고 미안해하면서. 사랑은 완벽한 존재가 다른 완벽한 존재를 만나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고유의 뾰족함과 틈을 가진 존재들이 서로 포용하고 인정하면서 아름다운 퍼즐을 만들어 가는 것임을 영화는 이야기한다.
물과 불, 흙과 공기처럼 저마다 다른 존재들이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이 착한 이야기는 다소 뻔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각 원소의 속성과 외형을 재기발랄하면서도 제법 과학적으로 구현해 낸 픽사만의 통통 튀는 감성은 단순하게 느껴질 법한 스토리를 더욱 아름답고, 뭉클하게 만들어 낸다.

원소의 관점이라는 독특한 세계관으로 다양성부터 가족애, 자아실현까지 많은 가치를 폭넓게 품고 있는 <엘리멘탈>은 반짝이는 영상미는 물론 감동과 재미까지 느낄 수 있는 어른들을 위한 종합선물 세트 같다. 픽사의 기존 작품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틀림 없이 두 눈을 반짝이며 보게 될 것이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캐릭터들과 뭉클한 이야기 너머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넘나든다. 부디 별난 원소 같은 우리들이 용기를 내 서로의 손을 잡고, 마침내 아름다운 무지개를 만들어 내기를. 픽사가 건네는 천진한 희망에 가슴 한편이 따뜻해진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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