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잖아, 스즈메.
아침이 오고 또 밤이 오고 그것을 수없이 반복하며 너는 빛 속에서 어른이 될 거야.
틀림없이 그렇게 돼. 그렇게 되도록 다 정해져 있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도 스즈메를 방해할 수 없어.
너는 빛 속에서 어른이 될 거야!
- 스즈메의 문단속 中
올해 초 얼어붙은 한국 영화시장에서 쏠쏠한 매출을 올린 영화가 있다. 바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이다. 동일본 대지진을 다루는 이 영화는 그의 전작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와 함께 재난 3부작으로 지칭된다.
2011년 3월에 일어난 일본의 동일본 대지진은 일본인들의 삶에 커다란 상실과 붕괴를 안겨준 사건이다. 거대 지진이 있었고 지진의 영향으로 쓰나미가 일어났다. 마을은 엉망이 되었고, 많은 사람이 가족을 잃었으며 더 이상 그곳에 살 수 없어서 피난을 가야 하는 일도 많았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사건 발생 후 11년이나 지난 시점에 개봉했지만, 여전히 트라우마에 고통받고 사회적 편견 속에 고립된 이들을 위로하는 영화다.
동일본 대지진의 피해자로 어릴 적 엄마를 잃고 이모와 살아가는 스즈메는 우연히 폐허를 찾아 다니는 청년 소타를 만나게 된다. 소타는 토지시, 즉 재난의 문을 닫는 자의 가문으로, 병상에 누워있는 할아버지를 대신해 곳곳의 재난을 단속 하는 중이다.
스즈메와 소타는 규슈 구마모토에서 시코쿠 지역의 에히메에서 혼슈의 고베, 그리고 도쿄, 후쿠시마까지 긴 여정 속에서 폐허의 문을 찾아 문단속에 나선다. 에히메는 서일본 집중 호우로 인한 산사태가, 고베는 1990년대 대지진이 있었던 장소다. 도쿄에서는 40만 명이 죽었던 1920년대의 간토 대지진이, 그리고 후쿠시마는 극 중 스즈메가 엄마를 잃은 동일본 대지진이 있었다. 스즈메는 실제 일본의 자연재해로 피해를 보았던 곳들을 들러 주문을 외우고 문을 닫는다. 비바람이 치고 폭우가 내리는 폐허 속 학교의 교실 문을 닫고, 대지진이 일어날 뻔한 유원지의 대관람차 문을 닫는다.
폐허가 되어버린, 수많은 이의 삶을 삼켜버린 곳을 찾아가 사람들을 만나는 스즈메. 지금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일상을 회복해 가고 있는 장소들의 사람들을 만나는 스즈메의 모험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비극에 대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만의 애도일 것이다.
재해를 찾아 막는 것은 스즈메와 소타뿐만이 아니다. 모험 길에 우연히 만난 사람들, SNS를 통해 상황을 중계하는 익명의 사람들까지 동료가 되어준다. 재난을 향해 가는 둘의 여정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인정을 베풀고 따뜻함을 남긴다. 이러한 점에서 직접적인 피해를 본 사람들만 고립되고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이 사회의 모든 이들이 트라우마를 받았으며, 모두가 함께 일상 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메시지도 전하고 있다.
감독은 제작 인터뷰에서 ‘스즈메’라는 이름을 짓게 된 경위에 대해 말하는데 이 부분이 참 인상적이다. 스즈메는 히라가나로 ‘참새’를 뜻한다고 한다. 우리가 매일 보는 새인 참새는 일상을 상징한다. 아침에 “다녀오겠습니다.” 로 시작해서 저녁에 “다녀왔습니다.” 로 반복하는 우리의 일상, 사랑을 주고받고 사소한 웃음이 머무는 일상이 거대한 자연재해로 단절되었다. <스즈메의 문단속>을 통해 감독은 그것이 마지막인지 알지 못한 채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했던, 결국 돌아오지 못한 수많은 사람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싶었던 것 아닐까.
인간이 막을 수 없는 일. 우리는 이런 거대한 현상을 재해, 재난이라고 말한다. 누구를 탓할 수도, 미리 알고 피할 수도 없다. 기나긴 인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이런 재난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음을 슬퍼하거나 두려워하며 살아왔다. 감독은 이 영화가 사람들의 상처를 자극하고 괴롭힐까 봐 많은 걱정을 안고 섬세하게 작업했다고 전한다. 실제로 트위터로도 재난 알림을 받거나 하는 특정 장면 안내에 대한 예고가 있었다고 한다.
가슴 아픈 재해의 역사를 실제 장소까지 차용해 가며 쓴 것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 진정한 애도의 시작은 그 장소를 기억하는 것부터일지 모른다. 그 장소에 사람이 있었고 그들의 일상과 사랑이 있었으니 말이다. 이제 폐허가 되어버렸지만, 소타가 재앙이 뿜어져 나오는 문을 닫으며 외쳤던 주문에 어쩐지 눈물이 났다. 바로보기 힘들지만, 그 고통과 슬픔의 자리를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치유가 시작된다.
“있잖아, 스즈메. 아침이 오고 또 밤이 오고 그것을 수없이 반복하며 너는 빛 속에서 어른이 될 거야. 틀림없이 그렇게 돼. 그렇게 되도록 다 정해져 있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도 스즈메를 방해할 수 없어. 너는 빛 속에서 어른이 될 거야!”
스즈메가 우여곡절 끝에 과거의 자기 자신을 만나고 치유하는 과정도 그런 맥락일 것이다.
일상은 일상이다. 평범하고 흔하다. 그러나 일상은 우리 삶 전부다. 사랑이 있고 희망이 있고 모험과 돌아올 곳이 있는 것이다. 도처에 널린 참새 같은 일상을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영화는 재난이 단절시켜 버린 안온한 일상의 소중함과 사랑의 특별함을 되새기게 한다. 또한 어떤 큰일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랑뿐임을, 더 소중히 여기는 일뿐임을 자각하게 한다.
감독은 현실의 재난을 영화에 실감 나게 담기 위해서 실제 배경을 일일이 방문했다고 한다. 신고베역과 관람차의 문이 나오는 고베 오토기노쿠니 공원, 히지라바시 다리 등…
무시무시한 재해와 그로 인해 고통받은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는 잔혹성과는 정반대로 신카이 마코토 감독 특유의 뛰어난 작화가 인상적이었다. 아름다운 풍경과 찬란한 색감.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일본 여행을 다녀왔는데, 스즈메가 사는 한적한 마을의 낮은 건물들, 전원과 도심의 풍경 같은 것들이 더 애틋하고도 특별하게 다가왔다.
문 너머 들이닥치는 재앙. 우리가 지금 딛고 있는 세계는 이와 아주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동일본의 대지진을 모티브로 한 영화에서 내가 있는 곳, 내 일상이 있는 곳을 본다. 스즈메가 마지막으로 문을 닫을 때 했던 주문은 “돌려드리옵나이다.”가 아닌 “다녀오겠습니다.” 였다. 이 평범하지만, 기적 같은 말이 지금까지도 고통받는 사람들, 그리고 개인사적으로 사회적으로 깊은 상처를 입은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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